대기업장치 산업으로 여겨지던 남성복 시대 ‘혁신 앞에 서다’
산업 성장기 2등 전략 더 이상 안 통해 … ‘일류 브랜드’ 육성해야
70~80년대 우리는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양복 제작상을 휩쓸곤 했다. 손재주는 세계 최고였지만 새 시대의 가치가 브랜드에 있다는 것은 몰랐다.
시장의 트렌드를 발견하지 못한 채 브랜드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메이커에만 머문 것이다. 이제는 그 자리마저도 중국과 동남아 등에 내어주고 있는게 현실이다.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 코트다” 브랜드 ‘버버리’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한 말이다. 어느 누구도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습한 영국 날씨를 위해 만들어진 개버딘(빗물이 잘 스며들지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직물의 이름) 레인 코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용 코트로 탈바꿈 됐다. 이것이 지금 ‘버버리’ 코트의 디자인 효시다. 참호를 뜻하는 ‘트렌치(Trench)’에서 트렌치코트가 탄생했고, 오늘날의 ‘버버리’로 이어진 셈이다.
하지만 ‘버버리’도 90년대 들어 체크무늬 트렌치 코트만을 고집하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출 부진은 곧 브랜드 존폐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너무 많은 소규모 상점들에 판매를 허용한 것도 문제였다. 헤롯 같은 고급 백화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일도 생겨났다.
100년이 넘는 브랜드도 결국 혁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음이 버버리를 통해 확인된 셈이다.
기성복 역사가 짧은 국내 패션 시장에는 안타깝게도 이 같은 헤리티지를 지닌 브랜드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래도 특유의 2등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해 왔다.
일류 브랜드에 도전하지만 언제나 카피가 우선시 됐다. 업황이 좋았던 지난 시절 국내 기업들은 시장을 만들어내는 능력 보다 패스트 세컨드 전략을 통해 초기 투자비용은 줄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메가트렌드를 읽지 못한 장기불황
이같은 전략은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혁신과 변화에 시간을 쏟기보다 만들어진 틈새시장을 찾아 장악하는 데 더 소질이 있었다.
실제 2001년, SPA ‘망고’의 한국 진출 당시 업계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싸구려 옷을 파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2005년 ‘유니클로’, 2008년 스페인의 ‘자라’, 2010년 스웨덴의 ‘에이치엔엠’이 줄줄이 진출하는 동안에도 관망하는 자세는 여전했다.
과거 불황이 찾아와도 ‘ V자형’ 회복을 경험했던 국내 업체들은 “싼 가격의 제조 판매 일체형 브랜드는 불황이 걷히면 유행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불황은 장기화로 흘렀고 소비자들의 구매 여력이 떨어진 환경은 SPA 성장에 힘을 더하면서 10년 만에 업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장기 불황’이라는 사회적 메가트렌드를 너무 쉽게 본 것이다. 이랜드, 삼성, 신성통상 등이 관련 사업에 뛰어 들고 있지만 수준의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장기 불황 덕분에 값싼 SPA가 성장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 같은 기간 강력한 브랜드 힘을 앞세운 고가 전략의 한섬과 수입 컨템포러리 시장 역시 엄청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업계는 곧바로 ‘저가 vs 고가’ 구도의 혼돈에 빠졌다. 어찌 됐든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제 과거 산업 성장기에 경험했던 뚜렷한 소비회복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3년 평균 소비성향(가처분소득 중 소비 지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201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 했다.
삼성패션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남성복 시장 규모는 5조3천883억원.
올해는 1.5% 상승한 5조4천720억원의 전망치를 내놨다. 자료대로라면 남성복 시장도 성장률이 감소세다.
예년과 같은 성장기의 달콤함은 맛 볼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다만 메가트렌드를 읽고 생존의 길을 찾는다면 소프트랜딩은 가능하다.
이제 더 이상 남성복은 장치 산업이 아니다. 초기 투자 비용만 지불하면 평생 유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패턴 몇 개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얼마나 찍어내느냐로 승부가 갈리는 산업 트렌드도 지났다.
제조 라인이 분리되면서 기획과 다양한 유통 채널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글로벌한 추세다. 대량 생산·판매 시스템이 아닌 발 빠른 대응력이 요구되고 있다.
대량 생산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충분하다.
자체 생산 공장을 보유한 곳도 몇 남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소싱이 다변화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전에 이전을 거듭하며 기업들은 해외로 유랑 중이다.
업계는 일찍이 다양한 시각에서 시장을 바라보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창의적인 패션 산업의 발목을 잡는 기업 문화와 지배 구조도 문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0년 전과 비교해 바뀌지 않는 기획 방식, 늘 무겁고 비대한 조직, 매번 지난해와 비교한 수치와 데이터 기반의 사업 전략. 1년에 두 번, 예측의 기획.
학계는 국내 메가트렌드로 기후변화, 인구감소, 고용·소득 불안 등 사회적 변화와 크로스오버쇼퍼(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소비자), 저가 제품 선호 확대, 소셜미디어 활용, 기능성과 성분과 내용물을 강조한 제품 수요가 늘고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여기에 간편 결제 활용, 공유 경제형 소비 등 생소한 용어도 등장하고 있다.
트렌드는 생성, 성장, 정체, 후퇴 등 변동 경향을 나타내는 움직임으로 시대정신과 가치관이 반영 되어 있다. 더 긴 메가트렌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 성장의 제1 조건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을 가진 핵심 사업을 가지는 것, 이후 확장 단계에서는 강력한 핵심 사업을 바탕으로 인접 영역으로 확장을 시도하는 것, 끝으로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지각 변동이 일상화 되면서 회사의 전략을 수정하고 재정의하는 것이다”
1966년 세상을 떠난 에르메네질도 제냐 회장이 남긴 말이다.
이제 국내 남성복 기업들도 장기 저성장 시대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생각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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