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 변화에 역행하는 시대의 적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숨통을 조이며 변화를 재촉하고 패션계는 트렌드를 쫓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게으름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제 ‘It Bag’은 더 이상 ‘트렌디’ 하지 못하다. 각종 패션지에 It Bag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면 이미 새로운 It Bag이 등장할 시점이 되었다는 소리니까. 테크놀로지에만 얼리어답터가 있는 게 아니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남들보다 더 빠른 트렌드 접속을 원하는 얼리어답터들에게 It Bag은 구태의연한 ‘과거’일 뿐이다.
트렌드가 소비자를 ‘속도’에 길들이게 만들었다면 속도, 곧 변화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더 빠른 속도’를 원한다. 오죽하면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란 용어가 등장했을까? 물론 지금의 패션 유통계의 흐름을 본다면 더 이상 ‘Fast Fashion’이 아닌 ‘Faster Fashion’이 등장해야 속도를 즐기는 소비자의 갈증과 굶주림을 간신히 해결해줄 성 싶다는 말이다.
패스트 패션과 슬로우 패션간 신경전
20세기 말 패션계의 가장 큰 ‘발명품’이라 할 만한 패스트 패션은 속도와 가격적 이점을 쫓는 소비자들에게 커다란 축복과 같았다. 밀라노와 파리 런웨이 무대에 등장한 ‘고가의 디자인’을 부담 없는 가격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전달하는 패스트 패션은 노골적인 디자인 카피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감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하이엔드·디자이너 업계가 런웨이에 올렸던 그들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매장에 반입할 때면 이미 그 의상은 ‘더 이상 트렌디’하지 않게 느껴지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디자인 창의성과 오리지낼리티는 하이엔드·디자이너 업계의 몫이지만 대중의 주머니를 여는 실질적 이득은 ‘패스트 패션’의 차지라고나 할까?
패스트 패션의 영향은 단지 ‘속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발 빠르게, 또 값싸게 다양한 아이템을 소개하다 보니 ‘트렌드에 뒤떨어져’ 버려지는 의류가 많아 자원 낭비와 환경 오염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값싸게 대량 생산’이라는 명제를 달성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노동력이 싼 곳에서 제품을 생산, 때론 노동자의 인권을 착취하는 스웻샵 논란에 쌓이기도 한다.
패션계가 더 이상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와 ‘소비자 만족’이란 안전한 울타리에 머물 수 없는, 환경과 사회적 책임의 의무를 갖고 있는 ‘지구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을 각성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 패션의 등장이었던 셈.
흥미로운 점은 패스트 패션은 스피디한 신제품 반입 속도와 트렌디한 면모로 소비자를 매혹시킨 만큼 패션계에서 ‘환경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지난 몇 년간 패션계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친환경’ 혹은 ‘윤리적 패션’ 혹은 ‘공정(fair)' 무역이라는 명제는 패스트 패션의 급속한 파급력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했던 하이엔드·럭셔리 업계가 내밀 수 있는 매우 ‘윤리적’이고도 ‘영리한’ 대응책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패스트 패션에 대항하는 ‘슬로우 패션(Slow fashion)’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느린 속도로 천천히 생산된 패션을 말하는 것이지만 작업 노동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임금’을 제공하고, ‘생산 속도’ 보다는 ‘제품의 퀄리티’를 생각하고 ‘불필요한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해 ‘적정량’을 생산하는 패션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패스트 패션에 비해 제작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지만 신제품을 생산하는데 투자하는 ‘디자인 스케치’ 시간이 좀 더 늘어나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와 제품도 향상 될 수밖에 없어 ‘지속력과 보관도’도 높아진다.
그 결과 트렌드가 지나면 버려지는 ‘소모성 의류’가 아니라 환경 보전측면에서도 보다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이 같은 슬로우 패션은 디자이너에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생산자에게는 ‘공정한 대우’를 제공하며, 자원낭비를 막는 ‘윤리적 패션’이라는 콘셉과 종종 오버랩 되면서 패스트 패션의 속도 전쟁에 지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얻고 있다.
느리고, 공정하고, 창의적이고, 지속적인 패션
실제로 럭셔리 제국 LVMH(모에헤네시루이비통)은 얼마 전 파슨스 디자인 스쿨과 제휴한 디자이너 양성 및 장인정신 고양 프로젝트 프로젝트 “The arf of Craftmanship Revisited: New York)를 진행했는데 이는 트렌드라는 일종의 ‘획일성’에 집착하는 패션계의 흐름에 반대하고 인내심을 바탕으로 디자이너의 창의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장인의 솜씨가 이루어낸 ‘슬로우 디자인’ 나아가 ‘슬로우 패션’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즉 대량생산과 속도전에 희생되어 사라져가는 의류 기술자-장인의 기술과 소규모 사업체를 디자인하고 디자이너의 절대적 사명인 크리에이티비티를 중시하는 ‘패션의 초심’으로 돌아오자는 것으로 패스트 패션의 확산으로 갈수록 변덕스럽고 획일화 되어가는 패션 및 패션 유통업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또한 톱숍의 런던 플래그십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Fair Trade 라벨 People Tree는 생산자들에게 ‘완성 시간’을 압박하는 대신 교육 지원 및 충분한 생산 시간을 제공하는 등 정당한 댓가를 지불한 의류로서 종종 패션의 속도화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하이패션 업체임에도 슬로우 패션에 동참하는 의식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톱숍은 Interna -tional Fair Trade Association)의 회원으로 15개 개발 도상국가 출신의 50개 공정무역 제조 업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가난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하청 공장을 두고, 국내 공장은 문을 닫아 노동자들의 실직을 유발하는 업계의 관행을 따르지 않는 뉴발란스(New Balance) 또한 슬로우 패션을 언급할 때 빼놓기 힘든 라벨이다.
연 매출이 16억 달러에 달하는 뉴발란스의 제품은 모두 미국 내 공장에서, 미국 내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어 노동자들의 속도전을 조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컬 경제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뉴밸란스는 로컬 공장 생산정책이 시장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서 생산량 증가나 재고 조정 유연성이 값싼 노동력 활용이라는 달콤한 유혹보다 실질적 이득이 크다고 강조하고 있어 ‘빠르고 값싸면=매출 유리’라는 일반적 패스트 패션의 공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편 인터넷 패션 리테일러 Adili는 계절을 타지 않는, 즉 트렌드에 민감하지 않는 디자인을 유기농 혹은 재활용된 소재로, 공정무역을 통해 생산함으로써 온라인 세상에서 슬로우 패션을 확산시키는데 한 몫하고 있다. 제3세계의 인권운동에 열심인 U2의 프론트맨 보노와 그의 아내가 론칭한 어패럴 라인 이듄(Edun:nude를 뒤집은 표현) 또한 아프리카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작업환경과 공정한 임금을 제공하고 생산한 공정무역의 산물이자, 슬로우 패션의 일가족이다.
불황 겪은 후 더 똑똑해진 소비자
값싸고 트렌디한 패스트 패션이 그야 말로 ‘Fast'하게 소비자들을 파고들었다면 슬로우 패션의 파급 속도는 상대적으로 ’Slow'하다. 하지만 불황을 겪으면서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소비의 중요성을 절감한 소비자들이 몇 번 입고 버리는 의류보다는 좀 더 가격을 주더라도, 유행을 덜 타면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의류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감지되고 있어, 슬로우 패션이 패션계에 차지하는 영역이 좀 더 넓어질 전망이다.
패션인사이트 2010. 7. 23(금)http://www.f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