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논란 확산, 패션업계도 ‘일촉즉발’

2013-06-11 00:00 조회수 아이콘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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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논란 확산, 패션업계도 ‘일촉즉발’


패션업계 판 ‘남양유업’ 언제고 터질 일

 
 

일러스트 김동유

김하나의 Real Report

갑을 문화 청산하고 파트너 신뢰 다져야


‘갑을 논란’으로 사회 전반이 뜨겁게 달궈졌다. 남양유업, ‘라면 상무’, ‘빵 회장’ 등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된 일련의 사건들로 ‘갑을’이란 키워드는 최고의 이슈로 떠올랐다. 해묵은 업계 관행들이 미디어의 갑을 프레임을 통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패션업계는 어떨까.


유통업계 ‘수퍼 갑’ 백화점의 불공정 행위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패션기업도 안심할 수는 없다. 남양유업 사태가 남일만은 아닌, 패션업계의 속내를 들여다 봤다.

 

#1. 최근 생산 프로모션 업체 A사는 거래처인 패션기업 B사로부터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이번 시즌 납품한 상품대금 가운데 20%를 깎자는 것이었다. ‘경기 침체로 매출이 좋지 않으니 고통을 분담하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A사 대표는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 시즌 이익을 내지 못할 게 빤히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소연했다.


#2. 본사와 대리점간 사입거래 하는 아웃도어 C브랜드 대리점주인 김모씨. 말이 사입거래지 본사에서 보내주는 물량을 거의 그대로 받고 대금만 납입해야 하는 그는 최근 떨어진 매출에 물량을 줄여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실 김모씨는 C브랜드를 운영하는 3~4년 간 꽤 쏠쏠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작년 겨울부터 매출이 급락하더니 올 봄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현금 흐름에 비상이 걸렸다. 본사에 물량을 줄여달라고 몇 차례 건의했지만 ‘목표 매출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벌만큼 버시지 않았냐’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김모씨는 “같은 브랜드 점주들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본사 입장이 완강해 도리가 없다”면서 “과격하게 항의한 어느 점주는 ‘대리점 하겠다는 사람 줄 섰으니 물량 받기 싫으면 매장 넘기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3. 인디 디자이너 D씨도 최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연초 중견 패션기업와 자사 브랜드의 납품계약을 체결하고 들떴던 기분도 잠시, 며칠이 지나 단가를 10% 더 깎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미 원부자재 발주가 끝나 생산에 들어가 있었기에 계약을 포기하면 큰 손실이 불가피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음달 현금으로 결재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현금으로 지급받기로 한 날에 D씨가 손에 쥔 것은 해당 업체도 아닌 B급 업체가 발행한 3개월짜리 어음이었다. 어렵사리 연결된 담당자에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가 전부였다.


◇ 공공의 적 ‘갑’, 패션업계 현실은?


패션업계에서 갑은 언제나 백화점이 꼽혔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다. 2011년 정부가 나서 입점 수수료 조정에 나설 정도로 백화점은 패션업계의 ‘공공의 적’으로 통했다. 이 과정에서 패션기업들은 ‘을’로서, 대기업 유통업체들에게 과도한 수수료를 떼이고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약자로 비춰져 왔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그토록 상대적 약자 이미지를 강조하던 패션기업은 생산 프로모션 업체, 인테리어 업체, 하다못해 쇼핑백 제조업체까지 수많은 ‘을’을 거느린 또 다른 ‘갑’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패션기업들이 영세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횡포가 백화점의 ‘갑질’을 넘어선다는 것은 웬만한 업계 종사자라면 알만한 사실이다.


그나마 대기업은 2011년 정부의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정책이 시행된 이후 함부로 협력업체를 몰아붙이지도 못한다. 하지만 패션기업들은 대다수 업체가 중소기업에 속해 오히려 보호대상으로 분류되어 정부의 공정거래 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내 패션기업과 거래하는 한 생산업체 관계자는 “백화점의 과장급 바이어 앞에서 꼼짝 못하는 E브랜드 본부장이 10년은 연배가 위인 나에게 슬쩍 말을 놓더라”면서 “툭하면 클레임을 치겠다고 어깃장을 놓고, 술자리에 불러내 술값을 대신 계산하게 하는 등 고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E브랜드의 사례는 그나마 개인의 부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생산업체를 상대로 요구하는 고통 분담금, 납기ㆍ품질 클레임을 빌미로 단가 후려치기, 사입 대리점에 물량 밀어내기 등 패션업계에서 수십년 동안 조직적으로 행해져온 ‘갑질’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 10년 공든탑 단번에 무너질 수도


패션기업에서 MD팀장으로 근무하고 현재 프로모션 업체를 운영하는 이모씨의 말을 들어보면 양쪽의 입장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는 “사실 악의를 갖고 있다기 보다 관행적인 측면이 강하다”면서 “또한 실적 압박을 받는 본부장이 수익률 개선을 위해 경영자 모르게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월급쟁이 임원은 매출 감소로 인한 수익률 하락을 메우기 위해서 원가 절감을 실무 팀장에게 종용하고 실무 팀장은 선배들이 해온 방식대로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악순환의 고리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패션기업의 대외신인도 제고를 위해서는 기업 경영진이 나서 거래 프로세스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 업계 전문가는 “국내 패션기업 중 상위권 업체들은 연 매출 5000억원을 넘어서며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했다”면서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되고 사소한 문제로도 대중의 지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乙의 역습, 진정한 파트너십 미리 다져야


업계 관계자 정모씨는 “국내 패션업계의 주요 소싱처였던 중국 내 인건비가 최근 2년 새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패션기업들이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이라며 “경쟁력 있는 글로벌 생산업체를 잡기 위해서는 하청업체 다루던 권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파트너십 구축이 먼저”라고 역설했다.


중국 내 제조업체 인건비 상승과 개성공단 폐쇄 등으로 국내 패션업계가 소싱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조직적인 갑을 문화를 배척하고, 생존을 위해 협력사와의 파트너십을 다져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최근 소싱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국내 패션기업들은 경쟁력 있는 글로벌 소싱업체에 찾아가 생산을 청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부동일 줄만 알았던 ‘갑을’관계가 뒤바뀌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연간 10조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소싱업체는 거래처 선정 기준도 깐깐해 결제미루기 등을 일삼기로 유명한 국내 기업을 외면하고 있어 상황은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대표적으로 에스겔그룹은 연간 1억벌 이상을 「샤넬」 「타미힐피거」 「폴로」 등 글로벌 브랜드에 납품하는 선두 티셔츠 제조업체다. 중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전역에 10여 개 공장을 보유했으며, 연간 매출은 1조3000억원, 직원은 무려 5만5000여 명에 달한다.


에스겔그룹의 성공 비결은 ‘을 입장임에도 거래처를 되레 까다롭게 선별하는 엄격함’에 있다. 협력사를 성정하는 데 있어 기업 규모뿐 아니라 운영 원칙과 신념, 윤리 등도 꼼꼼히 따진다. 이는 회사 규모가 작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기업 중에는 엄격한 선정 과정을 거친 LG패션, 베이직하우스 등이 거래하고 있다.


김석영 CJ오쇼핑 생산 고문은 “해외 패션기업들이 생산단순 하청업체를 넘어 상생해야 할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 기업은 아직도 과거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단기 이익을 위해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것은 결국 공멸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3년 6월 11일 패션인사이트www.f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