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역할 바꿀 때…적토마를 농마로 부려서야
베스트 상품에만 의존…재미 못 느낀 소비자 외면
일러스트 김동유
국내 패션시장 활성화를 위한 ‘긴급 좌담회’
국내 패션시장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새로운 구조와 채널을 기반으로 한 경쟁자들이 부상하면서, 기존 기업들은 빈곤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패션업계 현안을 공유하기 위해 3명의 패션기업 CEO와 2명의 전문가가 패션시장 활성화를 위한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자유로운 토크를 위해 익명 처리하였다.<편집자주>
◇사회 : 국내 패션시장, 특히 여성복 기업들의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A: 디자인 디렉터나 실장 중심의 상품기획 방법을 바꿔야 한다. 예전에는 패션이 애들이 어른처럼 보이기 위한 도구였다면, 지금은 어른이 애들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니 당연히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과거 성장기에는 실장이나 부장이 의사 결정을 해주고 디자이너들이 따라가는 추세였지만, 지금은 바뀌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자라」는 디자이너의 평균 연령이 26세다. 19세 전후로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자라」는 32, 33세가 지나면 의도적으로 내보내고,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고 한다.
B: 요즘 국내 기업들의 벽이 여기에 있다. 과거 성장기에는 실장 중심의 일사분란함이 성장을 빠르게 해 주었지만, 요즘과 같은 성숙기에는 최대 걸림돌이다.
C: 최근 국내 대기업서 근무하는 해외 유학파 디자이너들을 사석에서 만났더니 하나같이 “한국에는 디자이너가 필요없는 것 같다. 모두 실장만 쳐다봐야 하는데, 굳이 외국 유학파가 필요하나 싶다. 우릴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 월급도 많이 주면서 일은 너무 단순한 걸 시킨다”고 하소연 하더라.
B: 적토마를 데려 와서 밭일 하는 농마로 만든 격이다. 이런 조직 환경에서는 아무리 좋은 인재도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농마를 군마로 만드는 것이 장수의 능력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A: 요즘 디자이너들 잘 놀고, 소비자에 대해서도 잘 안다. 특히 구매력 높은 아줌마 고객들이 요구하는 디자인을 잘 그려낸다. 그런데 상품화되지는 못한다. 실장의 베스트 상품 기준에 어긋난다는 거다. 실장의 성공 경험이 강해 기준이 너무 명확하다. 그게 성공 신화였기 때문에 변화가 쉽지 않다.
B: 그게 우리의 과거 성장기 모습이다. 그렇다면 실장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이 해온 방법 보다 더 좋은 방법이 많은데 실장들이 그걸 모른다.
D: 기업 승계할 때도 전문 경영인을 내세우는 기업이 있는 반면, 오너 가계로 이어지는 기업이 있다. 하지만 후자는 잘못하는 예가 많다.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모르고 오너가 예전 경험으로만 가르치려고 하니 안 되는 거다. 우리의 조직 운영도 이와 비슷하다. 젊은 직원들이 실수가 있더라도 창의적인 스킬을 키워줘야 하는데 과거 기준만 얘기한다.
A: 한 외국계 회사는 최근 5년 동안 상품, VMD, 영업 등 핵심 부서를 맡고 있는 실무 책임자를 두, 세번씩 바꿨다고 한다. 처음 입사자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정말 바보처럼 실수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회사 경영자는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가 깨달아야지 누가 가르쳐줘서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체적인 틀만 짜주고, 정말 치명적인 실수만 안 하도록 하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C: 「자라」의 오르테가 회장은 최근 낸 자서전에서 ‘「자라」의 생명력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직원 채용시 생각이 너무 복잡하지 않고 마음이 열려 있는 친구를 뽑는다. 그리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한다’고 썼다. 참 교훈적이다.
◇ 사회: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VMD에 힘을 실어야 할 것 같은데.
A: 소비자가 구매를 결정하는 판매 현장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디자인 실장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다. VMD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전쟁에서 최전선의 중책인 분대장, 소대장들이 곧 VMD다.
D: 이번 신입 채용에서 VMD를 8명 뽑았다. 디자이너도 신입을 대거 채용해 기존 시스템을 바꿔 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졌다.
B: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과 의사결정 룰(Rule)이 문제다. 권한이 있는 사람을 훈련시켜 VMD로 전환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아무리 새로운 사람을 투입해도 기존 권력을 잡고 있는 실장의 마인드를 바꾸기 어렵다.
C: 예전 한섬이 잘 할때 그 이유를 ‘정보실’에서 찾았다. 이후 대부분 여성 기업들이 정보실을 갖췄다. 제일모직은 패션연구소로 확대했다. 그러나 삼성패션연구소조차도 높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한섬은 문 감사가 “너 이거 따라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 하는 식으로 해서 성과를 냈다. 고급 인력으로 정보실 만들고, 출장 보내고, 책만 사준다고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B: 지금은 VMD가 디자인실의 보조다. 말로만 중요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VMD는 경영자의 친위조직’이라고 할만큼 힘을 실어줘야 한다.
◇ 사회: 시장흐름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프로세스에 대한 개선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A: 그래도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는 가장 큰 희망은 우리의 ‘소비자’다. 어쨌든 사 주지 않느냐. 비싸도 사준다. 예쁘기만 하면 사준다. 우리나라는 디자이너들의 천국이 돼가고 있다. 예쁘거나 개성 있으면 사 간다. 이게 우리의 희망이다. 근데 백화점이나 경영자들은 효율성만 따진다. 아니 왜 효율성만 따지나? 패션의 본질은 비효율성 아니냐?
B: 시대에 따라 잣대가 다르다. 예전엔 변화무쌍함이 한국인의 특성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모험이 없다. 그 배경에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집착과 분석 회의가 있다. 우리 패션기업들의 주간 회의에 참석해 보라. A3 20장에 복잡한 분석 그래프, 경쟁사 자료, 날씨 분석 등 자료가 넘쳐난다. 그걸로 한나절을 얘기한다.
A: 패션은 감성에 맡겨야 한다. 과학이 아니다. 숫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은 과학적이되 운영은 감성적이어야 한다.
D: 여성복 기업들은 디자이너들이 트렌드 설명회 이후 기획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 시간에 SPA 브랜드는 벌써 발주에 들어갔다. 시장 조사를 하는 현장에서 스케치를 해야 하는데, 트렌드 설명회와 컬렉션 자료집이 없으면 기획이 안 된다. 지난 20여년간 특정 브랜드를 보고 베끼던 습성이 너무 강한 것 같다.
A: 한국 패션기업을 바라보면 안전 장치가 너무 많다. 해외 SPA나 온라인 브랜드는 낙하산이 없다. 지도나 낙하산 없이 곧바로 디자인 투입이다. 그러나 국내 브랜드를 보면 너무 복잡하다. 「에잇세컨즈」와 같은 브랜드도 플랜B 뿐이 아닌 C, D까지 준비한다.
B: 추락하는 기업의 공통점은 베스트셀러 아이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게 소비자에게 얼마나 단조로움을 주는 줄 모르고 단순히 베스트셀러만 고민한다. 워스트(worst)에 대한 생각이 더 중요하다.
C: 20%의 상품이 매출 80%를 채운다는 ‘8:2’에 대한 생각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패션은 ‘낫 베스트(Not Best)’나 워스트도 팔 수 있어야 한다. 제 역할이 있는데 20으로 80을 만들려고 하니 소비자가 매력을 못 느낀다.
D: 10여년전 일본 이토요가도가 공급사설관리(SCM) 관련 컨설팅을 받으면서, 3만 가지 아이템을 잘 나가는 것 중심으로 1만 가지로 줄였더니 매출액은 큰 차이가 없는데 비해 초반 이익액은 엄청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9개월이 지나니 매출이 급격히 하락했다고 한다. 소비자는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을 놓친 것이다. 소비자는 A, B급이 아니라 가끔 C, D급도 사고 싶어 한다. 소비자는 C, D급 상품이 있을 때 A, B급을 사고 또 가끔은 C, D급도 산다.
B: 유럽 사람들과 일하면서 느낀 것은 ‘안 팔린 것도 브랜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안 팔린 상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 BBC 여론조사 결과, 소비자는 구매 상품의 70%는 거의 안 입고 옷장에 넣어둔다고 한다.
A: 백화점 플로어 매니저들이 “요즘 모든 브랜드에서 잘 나가는 특정 디자인이 왜 당신 브랜드에는 없느냐”는 말을 가끔 한다. 그럼 한 층에 있는 30개 브랜드가 모두 같은 디자인을 팔아야 하나. 백화점은 다양성이 생명이다. 백화점이 알면서도 효율성만 따져서는 소비자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비자들이 비슷한 것을 많이 입었지만 개성 시대인 지금은 결코 아니다.
B: 우리나라 대표 유통인 롯데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젊은 오너로 바뀔 때 누군가 책임있게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추락하는 기업의 외부 요인은 10%도 안 된다. 백화점들의 현재 난국은 자초한 것이다.
◇ 사회: 백화점의 과감한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백화점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A: 2005년 이전엔 브랜드, 백화점, 소비자 사이에 불편한 건 있었지만 산업 평화가 있었으나 그 이후 깨졌다. 치열한 생존 경쟁을 했다. 지난 몇 년간 특히 롯데백화점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전략 없이 눈 앞의 효율만 따졌다. 전략은 1, 2년 안 되더라도 그 이후 잘될 것을 준비하는 건데 말이다. 한류만 바라보고 소녀시대를 내세운 마케팅으로 변화가 가능하겠는가? SPA는 길어야 5년이다. 소비자는 ‘무조건 가격만 싼 것’에서 벌써 발길을 돌리고 있다. 셀렉트숍도 전문인력 없이 임기응변식으론 더 이상 파이를 키우지 못한다.
B: 과거에는 ‘온리 롯데’라도 있지 않았나? 1, 2층은 동대문 상품으로 채우고 3, 4, 5층에 미니어처로 브랜드를 구성하는 건 아니지 않나? 차라리 가능성 있는 브랜드에 264~330㎡ 매장을 주고, 영 캐주얼 전문점을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C: 미안한 얘기지만 도심 한복판에 아웃렛을 만드는 건 세계적인 유통기업이 할 일은 아니다. 롯데가 정말 세계적인 유통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한국 패션산업이 활성화 될 수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 차라리 서울역과 연계한 아웃도어 전문관을 만들던지, 시부야109나 도쿄플라자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2013년 7월 2일 패션인사이트www.f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