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패션 트레이드 페어 모델 절실
세계 패션산업 ‘패션쇼’서 ‘트레이드쇼’로 중심 이동
올해는 여느때 보다 풍성한 패션 전시 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패션리테일페어 행사장 전경.
세계 패션 산업의 무게 중심이 패션쇼 중심에서 트레이드 페어로 이동하는 가운데, 올해 국내에서도 다양한 전시회가 개최돼 관련 산업 성장의 기대감을 높여 주었다.
올해 국내에서 개최된 패션 전시회는 10여개. 1월 첫 개최된 코리아스타일위크를 시작으로 3월 서울패션페어, 룸스링크서울, 9월 인디브랜드페어, 패션리테일페어, 대구패션페어, 10월 패션코드, 서울패션페어, 부산패션위크가 연이어 열렸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가 패션코드 2013을 신설하고, 서울시가 서울패션위크 전시회 부문인 서울패션페어의 전문성과 비중을 확대하는 등 ‘트레이드 페어’로 지원 사업의 무게 중심을 옮겼다. 또 대구시가 대구패션페어의 신진 디자이너 부문을 강화하는 등 중앙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확대돼 업계는 크게 반기고 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시기 상조라는 분위기였던 패션 전시회는 2011년 한국패션협회와 패션인사이트가 공동 주관한 ‘인디브랜드페어’를 기점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신진 디자이너 육성과 실질적인 판로 제공을 목적으로 시작된 ‘인디브랜드페어’는 새로운 콘텐츠 발굴을 갈망하던 유통, 패션기업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2012년부터 패션리테일페어, 룸스링크 서울, 코리아스타일위크, 패션코드 등 여러 패션 전시회가 연이어 출발을 알리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실질적인 바잉을 위한 ‘트레이드 쇼’ 확대를 반기고 있다. 패션 산업이 리테일 시대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독창적이고 새로운 콘텐츠의 공급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김영한 원더플레이스 대표는 “셀렉트숍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새로운 브랜드 발굴”이라면서 “국내 패션 전시회가 늘어남에 따라 경쟁력 있는 신규 브랜드를 발굴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패션 전시 산업의 역사가 짧은 데다 관련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은 국내 실정상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특히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의 지원이 행정 편의주의에 따라 분산되면서 혼란이 생겼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패션 업계는 “지방 정부가 주도해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된 베를린 패션위크나 민간이 연합해 6개 패션 전시회를 연계한 라스베가스의 ‘모던 어셈블리’ 등을 토대로 한국형 트레이드 페어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올 한 해 개최된 전시 행사를 통해 국내 패션 전시 산업의 가능성과 보완점을 점검해봤다.
◇ 전시회의 콘셉과 타깃부터 명확히 해야
올해 열린 패션 전시회들의 가장 큰 지적 사항으로는 변별력이 떨어지는 전시회 콘셉의 부재가 꼽혔다.
특히 정부, 지자체가 주최한 행사는 사업 목표에서부터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으로 초점이 맞춰져 차별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다. 물론 사업 시행 초기라 첫 술에 배부르지는 않겠지만, 향후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시급히 전시회 별로 독자적인 전문 모델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패션 전시회들을 살펴보면 이런 흐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패션 전시 산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의 전시회들을 예로 들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매직쇼’를 중심으로 컨템포러리 브랜드 전시회 ‘프로젝트쇼’, ‘ENK베가스’ ‘텐트쇼’ ‘MVMNT’ ‘플랫폼’ 등 ENK인터내셔날이 주최하는 전시회만 10여개가 같은 기간에 열린다.
하지만 참가 브랜드가 중복되는 전시회는 하나도 없다. 저마다 뚜렷한 콘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가 브랜드 역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적합한 전시회를 선별해 나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ENK에 대항하기 위해 분야별 6개 전문 전시회가 연합한 ‘모던 어셈블리’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라스베가스 전시회의 중심인 매직쇼와 프로젝트쇼에서 다루지 않는 스트리트 캐주얼 전문(아젠다쇼),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캡슐쇼), 패션&라이프스타일(리버티쇼), 액세서리(더액세서리) 등으로 세분화 했다.
국내 소비자들의 패션 소비 역시 ‘남성복’ ‘여성복’ 등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패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리빙, 라이프스타일 등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에 따라 패션 산업의 영역은 과거 디자이너 중심에서 홀세일 브랜드, 액세서리와 넓게는 음악과 문화까지 포함할 정도로 저변이 확대됐다.
결국 리테일러들도 이런 소비자들의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콘텐츠 발굴에 나섰지만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는 플랫폼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시회 별로 콘셉과 타깃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A 기관은 ‘신진 디자이너가 시장에 이름을 알리 수 있는 무대’, B 기관은 ‘문화와 예술을 포함한 대중적 패션 브랜드 육성’, C 기관은 ‘국가 대표 디자이너 육성 프로젝트’같은 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와 지자체의 패션 산업 지원은 크게 반길 일이지만 한 분야에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다양해진 패션 영역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플랫폼을 키우거나 아니면 전문적인 영역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 바잉 시점과 동떨어진 개최 일정
홀세일(Wholesale)은 전 세계 패션 시장에서 가장 큰 유통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다. 브랜드 전개 업체는 시즌보다 6~7개월 앞서 열리는 트레이드 쇼에서 자신들이 기획한 신상품을 선보이고 리테일러들은 자신의 안목에 따라 바잉할 상품과 수량을 결정한다.
세계적으로 이탈리아 피티 워모(1월, 6월)를 시작으로 베를린(1월, 7월)과 파리(1월, 7월), 뉴욕(2월, 8월), 라스베가스(2월, 8월)를 거치면 홀세일 오더를 1차 마감하게 된다. 이어서 세계 4대 컬렉션(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에서는 하이엔드 디자이너 상품의 바잉이 일어나고 파리 패션위크를 끝으로 시즌 오더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올해 열린 국내 패션 전시회 중에서 이 일정에 맞는 전시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행사인 서울패션위크 마저도 파리패션위크가 끝난지 3주가 지난 시점에 열렸다.
해외 바이어 입장에서는 시즌 오더를 마무리하고 세일즈 플랜을 세워야 할 시기에 또 다시 해외 출장을 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한국 브랜드에 관심이 있거나 기존 거래 바이어들이 약간의 예산을 확보한 채 방문하는 것이 고작이다.
업계는 안 그래도 좁은 내수 시장에, 홀세일 유통 비중이 낮은 국내 실정상 해외 바이어의 적극적인 유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신진 디자이너 A씨는 “전시회가 실효성이 있는 시기에 열리고 바이어만 충분하다면 참가비 100~200만원은 아깝지 않다. 하지만 바잉 시점도 맞지 않고 바이어가 적기 때문에 참가를 기피하게 된다. 정부나 지자체가 참가비 지원과 하드웨어에만 신경쓰기보다 오히려 참가비는 제대로 받더라도 그 비용을 적극적인 해외 홍보와 유효한 해외 바이어 유치에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유통업체 홀세일 비중 확대해야
전시회 활성화를 통해 다양한 신규 브랜드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국내 유통 구조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국내 패션 산업이 과거 30여년 동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위탁 판매’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재 국내 패션 산업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 역시 위탁 제도의 구조적인 한계에 있다.
위탁 제도의 근원적인 한계는 브랜드 단위의 머천다이징으로 인해 독창적이고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 홀세일로만 운영하는 해외 유수의 브랜드들과 직접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점도 꼽힌다. 더 크게는 신진 디자이너나 인디 브랜드들이 판매 후 대금 결제와 재고 부담 때문에 백화점 입점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구조적인 문제가 위탁 제도라는 유통 시스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패션 산업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홀세일 유통 구조의 확대가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한 리테일 산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요구도 제기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쇼룸과 이를 운영하는 세일즈렙(Sales Representative)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비즈니스가 원활하지만 국내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복수의 전문가들은 “브랜드와 리테일러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세일즈렙이 필요하다. 이들은 브랜드에는 시장 경쟁력을 행사함으로써 리테일 산업을 활성화시킨다”면서 이에 대한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원성진 스컬프 대표는 “국내 패션 유통에서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하는 백화점이 위탁제의 굴레에 갇혀 있다보니 신진 디자이너나 소규모 브랜드의 활성화가 더딘 것이 사실”이라면서 “최근 일부 백화점에서 직매입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더 많은 유통업체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규모도 더욱 확대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3년 11월 1일 패션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