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 시장서 활약하는 한국계 바이어 3인
'K패션이 진짜 성공하는 법'을 말하다
서울패션위크서 '블라인드니스'에 주목
한국 디자이너 재능 넘치지만 남과 다른 걸 보여줘야
10월 16일 루비나의 전시 개막 행사를 시작으로 엿새 동안 열린 2018 S/S 헤라서울패션위크. 행사 첫 컬렉션인 얼킨(ul:kin)의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워킹을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당장 유행을 따르는 옷은 파리·밀라노·뉴욕 등등 세계 어디에서나 넘친다. 그런 걸 사러 우리가 서울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 10월 17일부터 닷새간 세계 패션 시장의 진짜 '인플루언서'들이 서울을 찾았다. 2018 봄·여름 헤라 서울패션위크를 보러 각국 주요 바이어가 속속 모여들었다. 바니스 뉴욕 백화점의 레아 킴(44) 여성복 부사장,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의 지니 리(45) 여성복 바이어, 북유럽 대표 디자이너 쇼룸 '헨릭빕스코브'의 룬 박(38) 바이어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10~20년간 패션업계에 종사하며 새로운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발굴'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춘 자리에 오른 데다, 한국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국적은 킴과 리가 미국, 팍이·덴마크). 세 사람은 1~2년 전 처음 서울패션위크에 초청을 받은 이래 일 년에 두 번씩 서울을 찾고 있다. 국내 패션업계가 세계 무대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요즘 이들에게 K패션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10월 21일 패션위크 기간 중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따끔하지만, 현실적이고 솔직한 조언을 들려줬다.
서울패션위크를 찾은 한국계 바이어들. 왼쪽부터 바니스 뉴욕 백화점의 레아 킴 부사장, 북유럽 디자이너 쇼룸 '헨릭빕스코브'의 룬 박 바이어,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의 지니 리 바이어.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Q : 서울패션위크를 직접 보기 전과 달라진 게 있나. A : "2017년 봄 지난 시즌에 처음 왔을 때부터 두 개 브랜드를 바잉(구매)했다. 한 번 그렇게 인연을 맺으니 계속 오게 될 이유가 생겼다" (킴) "막연히 서울은 뭔가 성장하리라는 기대감에 왔는데 실제 그랬다. 디자이너들이 재능과 센스가 넘쳐서 협업할 수 있는 이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 (리)
Q : 서울패션위크의 강점과 단점을 꼽자면. A : "세계 시장에서 스트리트 패션이 강세인데 서울패션위크에서 그런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 유럽은 옷 자체보다 브랜드 마케팅이나 홍보가 중요한데, K팝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서울패션위크를 알릴 만한 좋은 기회를 얻은 것 같다." (박) "맞다. 스트리트 스타일이 강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뿐만 아니라 모델들의 스타일링 자체가 여느 도시보다 강렬하다. 컬러풀하기도 하고 액세서리를 쓰는 것도 과감하다. 시선을 끄는 굉장한 강점이라고 여겨진다. 단점을 꼽자면 카테고리를 확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남성복이 그렇다. 아이템도 소재도 늘 봐오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혁신적이라는 생각이 덜 든다. 우리한테는 그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중요한 카테고리다. 원단 하나도 가공을 달리하면서 별도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 (리)
2018 봄여름 '블라인드니스' 컬렉션.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의 구분을 파괴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Q : 눈에 띄는 디자이너가 있나. A : "신규용·박지선 디자이너의 '블라인드니스(Blindness)'다. 쇼를 본다는 건 디자이너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그들 쇼는 굉장히 독창적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은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로부터 영감을 얻는 게 보인다. 그런데 블라인드니스는 어디서 가져온 게 아니라 완전히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다. 특히 성 정체성에 과감하게 열려 있다. 블라인드니스라는 이름이 눈 앞에 보이는 성에 대한 편견이나 벽에 눈을 감으라는 의미겠구나 싶을 정도다. 젠더리스를 추구하는 지금 패션 무드와도 잘 맞는다. "(킴)
"나도 블라인드니스에 한 표 던지고 싶다. 남자 모델들한테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복을 입힌 게 굉장히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블라인드니스 외에는 박환성 디자이너의 '디앤티도트(D-ANTIDOTE)'다. 2017 봄/여름 시즌에 이어 이번에도 스포츠 브랜드 휠라와 협업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세계시장으로 나갈 준비가 돼 있는 거 같다."(리)
"다른 브랜드를 꼽고 싶지만 나 역시 블라인드니스다. DNA 자체가 굉장히 강해서 여기 오자마자 따라다닌 브랜드다. 강렬함을 넘어서 일종의 충격이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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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브랜드 휠라와 협업한 디앤티도트의 컬렉션. [사진 디앤티도트]
Q : 낯선 한국 디자이너가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고 성장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뭘까. A : "블라인드니스를 언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하고 싶다. 내가 서울에 오는 이유는 글로벌 트렌드를 그대로 따라가는 엇비슷한 옷을 찾으려는 게 아니다. 좀더 특별하고, 남다른 걸 고르려는 거다. 특이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디자인을 선보일 준비가 돼 있느냐다." (박)
"당연히 독창성과 창의성이다. 다른 것과 비슷하다면 절대 안 산다. 디자이너 스스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 더 꼽자면 품질이다. 간혹 디자인에 비해 퀄러티가 그닥 좋아 보이지 않는 한국 브랜드가 있는데 바이어로서 퀄리티는 포기 못할 부분이다. 패션쇼는 미디어를 위한 행사라 감성적이고 환상을 주기만 하면 성공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가 아니라 바이어인)우리는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고객이 살까 말까를 따져 정해야 한다. 사람들이 매장에 왔을 때 가장 처음에 하는 게 뭔가. 바로 만져 보는 거다. 거기서 멈추면 입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킴)
왼쪽부터 레아 킴 부사장, 지니 리 바이어, 룬 박 바이어. 세 사람은 모두 세계 패션 시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한국계로 1~2년 전부터 서울패션위크를 찾고 있다.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Q : 디자이너 능력 외의 요인을 꼽는다면. A : "서울패션위크는 컬렉션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한 장소에서 대부분 열리기 때문에 동선이 편리하다. 하지만 그 점이 거꾸로 한계가 될 수도 있다. 파리만 해도 패션쇼가 정원·궁전·박물관 등 도시의 중요한 곳에서 열리다 보니 새로운 경험이 되고 또 기억에 남는다. 일종이 도시 크루즈가 되면서 도시와 패션이 하나로 연결된다. 이에 비해 서울패션위크는 서울의 장점을 다 살리지 못한다. 내 주변만 해도 서울을 궁금해 하는 업계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다. 도시 자체를 패션쇼장으로 삼는 시도도 필요하다. "(리) "신진 브랜드라면 아무래도 바이어들이 많은 곳에 가게 된다. 미국도 뉴욕패션협회가 지원 해서 파리에서 창의적인 쇼를 연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 패션 행사에 나가는 게 도움이 될 거다.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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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합리적인 가격과 신선한 개성을 특징으로 하는 '스몰 럭셔리' 콘셉트로 인기 몰이 중이다. [중앙포토]
Q : 실제 해외 현지에서 한국 패션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A : "사실 내 주변 바이어들은 한국 디자이너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 블라인드니스처럼 좋은 디자이너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K팝이나 스트리트 감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지드래곤을 안다고 한국 옷이 팔리는 건 아니지 않나. " (리)
"(덴마크에 있는) 우리 쇼룸은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와 201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협업을 했고, 반응이 좋아서 2018년 여름에도 함께할 계획이다. 젠틀몬스터는 한국 브랜드가 세계 시장에 어떻게 진출해야 하는지 좋은 예다. 한국적인 감성으로 디자인을 하면서도 특유의 예술적 표현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적인 것과 글로벌 감성의 조화를 잘 엮어낸다. "(박)
Q : 서울에 올 때마다 꼭 찾는 장소가 있다면. A : "강남 골목 골목을 다닌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매장들 중에 영감을 얻을 만한 물건이나 디스플레이가 많다." (박) "청담동 명품거리를 가곤 한다. 다만 보통 대도시에서는 럭셔리 매장이 모여 있는 곳을 가는데 서울에서는 명품 거리에 한국 브랜드가 없어서 이 도시만의 트렌드를 찾기 어렵다는 게 아쉽다." (킴)
글=이도은 기자dangdol@joongang.co.kr, 사진=서울디자인재단
출처 : 중앙일보